- 작성시간 : 2022/11/2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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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 <환상곡 C단조 K.475>)
상쾌한 아침 맞으셨는지요? 절기상 눈이 조금 내린다는 '소설'이 며칠 전에 이미 지나갔더라구요. 오늘 아침엔 문득 함박눈 펑펑 내리는 정경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일종의 완벽주의에 시달리며 살아오다가 몇 년 전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완벽주의란 '나는 그거 절대 하기 싫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고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1.모짜르트 <환상곡 C단조 K.475>
<잘 모르지만 클래식 음악 한 곡 선곡하기 시즌4>를 이어갑니다. 오늘은 이채훈 <1일 1페이지 클래식 365>에서 모짜르트의 <환상곡 C단조 K.475>를 소개한 내용 전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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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는 즉흥 연주가 누구보다 탁월했다. 그는 협주곡을 연주한 뒤 청충들의 환호에 즉흥 연주로 답하곤 했다. 1787년 1월 프라하에서 요한 프라이슬러는 모짜르트의 즉흥 연주를 듣고 말했다. "이 조그만 인간, 위대한 거장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음악적 경험을 주었다. 너무나 멋진 연주여서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그는 가장 어려운 패시자와 가장 사랑스런 주제를 교묘하게 결합시켜서 연주했다." 같은 연주회에 대해 전기 작가 니메첵은 이렇게 기록했다. "연주회 마지막 부분에서 모짜르트는 혼자 30분이 넘도록 즉흥 연주를 했는데, 이때 청중들의 기쁨은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는 감동에 겨운 나머지 크게 환호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즉흥 연주'는 요즘은 재즈에서 볼 수 있을 뿐, 클래식에서 들을 기회가 드물다. 모짜르트와 베토벤 시대에 즉흥 연주는 음악가의 자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즉흥 연주를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작곡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번스타인은 "주제 뒤에 이어져야 할 바로 그 음을 찾아내는 특별한 재능"이 바로 작곡가의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짜르트의 즉흥 연주를 들을 수 없다. 그마나 환상곡 C단조 K.475가 있으니 그의 즉흥 연주 스타일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환상곡'답게 특정한 형식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흘러간다.
이 환상곡은 같은 조성인 C단조 소나타 K.457과 함께 제자 테레제 폰트라트너에게 헌정했다. 모짜르트의 G단조가 '비극적'이고 D단조가 '악마적'이라면, C단조는 '영웅적'인 고귀한 슬픔이다. C단조 소나타와 환상곡은 함께 묶어서 출판됐고, 요즘도 나란히 연주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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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태춘, 나는 누구인고
인생 궁극의 질문 중 하나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얘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떼고, 내가 성취했다고 하는 그 무엇들을 떼고, 나와 남 사이를 규정하는 관계형 호칭을 빼고, 헛된 이름과 호칭들을 다 떼고 나면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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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2014. 11. 24.)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만든 허상 속에 갇혀 사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강하게.
내 생각이 만든 허상이란?
나는 괜찮은 놈이라는 생각, 나는 우월한 놈이라는 생각, 나는 하챦은 놈이라는 생각, 나는 열등한 놈이라는 생각. 실상 나는 '그저 나'
누구는 괜찮은 놈이라는 생각, 누구는 우월한 놈이라는 생각, 그는 하챦은 놈이라는 생각, 그는 열등한 놈이라는 생각. 실상 그는 '그저 그'
세상은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 세상은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 세상은 아름답기만 한 곳이라는 생각, 세상은 추잡하기만 한 곳이라는 생각. 실상 세상은 그저 '세상'.
내가, 누가, 세상이 문제있다고 생각할 때, 다름 아닌 내 생각과 그것이 만든 허상을 들여다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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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두, 대화가 필요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이라는 명제가 실제 세상에서는 잘 구현되지 않는 걸 봅니다. 다름은 곧 틀림이라는 틀이 인류의 집단무의식 속에 내장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의심도 해 봅니다. 개인간에도, 조직간에도, 국가간에도 서로 남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기 생각을 강요하느라 바쁩니다. 평화로운 공존이란 게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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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아보는 모멘텀, 3분 고전 2>, 박재희 저, 작은 씨앗사 간.
* '사경'하는 기분으로 좋은 글들을 받아쓰기 해 봅니다.
[ 나와 다르다고 공격하면 손해가 되어 돌아온다.
공호이단(攻乎異端) - 논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위태로운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름 이유가 있으며 의미가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 종교와 철학 등 살아온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로지 내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나만이 정통이고 상대방은 이단(이단)이라는 편견과 고집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ㄱ덧입니다. 이런 이단에 대한 공격과 무시는 때로는 폭력과 협박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단(異端)'이라는 단어는 <논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논어>의 [위정]편에 보면 공자가 이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자세히 나옵니다.
攻乎異端 斯害也已
공호이단 사해야이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하여 공격하면
이것은 손해가 될 뿐이다.
나와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배척한다면 결국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단에 대한 공격과 강요가 결국 심각한 갈등과 분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세상에는 저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피부를 가진 수많은 민족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과 철학,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인류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한 서로 다름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논어>의 가르침입니다. 오로지 나만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는 순간 나와 다른 모든 것들이 이단으로 여겨지고, 그 결과는 갈증과 분쟁, 폴력과 전쟁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주자는 공(攻) 공부(工)라고 해석하여 이단을 공부하며 해가 될 것이라고 주석하였습니다만 유교 이외의 이단을 배격하고 주자학의 정통을 세우기 위해서 그런 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서로 다름이 인정되는 사회, 위대한 화합을 이루어낸 세상은 우리 인류가 꿈꾸어야 할 아름다운 미래입니다. 나와 다른 관점, 종교, 사상, 철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한다면 큰 불행을 초래할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남을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공호이단(攻乎異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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