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시간 : 2022/12/18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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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교향곡 9번 C장조 <그레이트>)
상쾌한 아침 맞으셨는지요? 오늘 아침은 이번 겨울 들어 기온이 제일 낮은 날인 모양입니다. 서울이 영하 12도, 전주가 영하 8도 가까이 내려갔네요. 그나마 바람이 별로 불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사람이 다 갖출 수 없고 좋은 것 다 가질 수 없다는 정약용 선생의 싯구를 메모해 놓았었네요. 다 갖추지 못하지만, 그렇게 부족한 부분이 있는 채로 그런 대로 사는 게 '완전이 아닌 온전'의 삶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게 필요한 모양입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정약용의 시. 이게 바로 우주의 질서를 그린 것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질서라는 건,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질서도 아니죠. 그렇게 맘에 안 차게 엇갈리고 무질서해 보이는 게 진짜 질서일 것 같습니다.*
독소(獨笑)
다산 정약용
有粟無人食 양식은 있는데 먹을 사람 없고
多男必患飢 아들 많으면 주릴까 걱정이지
達官必憃愚 벼슬 높은 사람 반드시 우둔하고
才者無所施 재주는 있어도 그 재주 펼 곳이 없다네
家室少完福 모든 복 갖춘 집안 드물고
至道常陵遲 지극한 도(道) 언제든지 무너지지
翁嗇子每蕩 애비가 인색하면 자식은 방탕하고
婦慧郞必癡 아내가 영리하면 남편은 어리석네
月滿頻値雲 달이 차면 구름이 자주 가리고
花開風誤之 꽃이 피면 바람 불어 꽃잎 날리네
物物盡如此 세상만사 모두가 그러하니
獨笑無人知 혼자서 웃어도 알 사람 없다네]
1.슈베르트 교향곡 9번 C장조 <그레이트>
<잘 모르지만 클래식 음악 한 곡 선곡하기 시즌4>를 이어갑니다. 오늘은 이채훈 <1일 1페이지 클래식 365>에서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C장조 <그레이트>를 소개한 내용 전해 드립니다. 작품이 작가의 개성을 드러낸다고, 이 곡을 들으면서 슈베르트는 참 결이 고운 사람이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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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는 "죽어서도 작곡하는 사람"이란 별명을 얻었다. 살아서 발표하지 못한 작품을 후세가 발견하여 뒤늦게 발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교향곡 8번 <미완성>도 그랬고, 9번 <그레이트>도 그랬다.
슈만은 1839년, 빈에서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를 만났다. 형은 잠자고 있던 슈베르트의 유고들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슈만에 따르면 "오페라, 4개의 대미사곡, 4~5곡의 교향곡 등 엄청난 악보들"이었다. 거대한 규모의 C장조 교향곡도 있었다. 슈만은 피아노 앞에서 악보를 읽다가 전기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이 곡을 초연해야 한다고 페르디난트를 설득해서 허락을 받은 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수의 지휘자 맨델스존에게 악보를 넘겨 주었다. 맨델스존은 기꺼이 초연을 지휘하여 숨어 있던 보물을 세상에 알렸다. 슈만은 <신음악지>에 이 곡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썼다.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이 사람 목소리 같아서 합창을 듣는 것 같다. 화려한 관현악, 웅대한 형식, 절묘한 분위기 전환 등 모든 것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낯선 세계는 듣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지만, 동화나 마법의 세계를 경험한 것과 같은 사랑스러운 잔향을 남긴다."
이 교향곡이 세상이 빛을 볼 수 있게 된 건 슈만과 맨델스존의 공이다. 낭만시대 초기의 젊은 작곡가들은 서로 돕고 격려했다. 그들의 우정이 있었기에 더 많은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생애 마지막 해인 1828년 완성했지만 빈 음악동우회는 "너무 길고 무겁다"며 연주를 거부했다. 낭만의 향기가 넘치는 이 교향곡은 지금 슈베르트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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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연준, 고향의 봄
여우도 돌아가는 날엔 머리를 고향 쪽으로 돌린다는데, 나의 고향은 정말 어디인 건가 생각을 해 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고창군 신림면에서 태어났지만, 두 살 때 가족들이 모두 고창을 떠났고 태어난 동네도 사라져 버렸으니 고향을 잃어버렸다면 잃어버린 사람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어릴 적 방학 때마다 내려가 있던 외갓집 동네가 있어서 그곳이 고향 마을처럼 느껴지긴 합니다. 그 외갓집마저도 그 동네에 많던 고인돌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고인돌공원이 만들어지면서 집들이 개울 건너 다른 동네로 옮겨가서 또 조금 고향이란 어디인지 애매해지기도 했지만요. 기억만은 외갓집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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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2018. 12. 18.)
페친 유영선 부장의 오늘 포스팅이 어릴 적 외갓집 추억을 소환했다.
나는 태어난 곳이 고창군 신림면이지만, 외갓집도 같은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매산부락에 있었다.
나 세 살 때인 1969년에 서울로 가족이 전부 이사를 했지만, 나 국민학생이던 시절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엄마는 묘하게 내 여름방학, 겨울방학과 겹치는 외할아버지 제사 외할머니 제사에 나를 꼭 데리고 가서 제사에 참석하고, 나를 외갓집에 맡겨 놓고 서울로 올라가시곤 했다. 가끔은 외갓집에서 시오리 거리에 있는 이모님댁에 맡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 10대 초반부터 생업전선에 나서 10대 후반이 되어가는 내 형이야 자기 간수 자기가 했겠지만, 엄마도 생업에 종사하면서 나를 포함한 형 밑의 세 남매를 뒷바라지하는 부담을 더시기 위해 외갓집에 나를 맡겼던 것 아닌가 싶다.
우물가 바로 옆, 논을 바로 앞에 두고 있던 외갓집은 어른 허리께 정도 밖에 안 되는 벽돌담장이 있었지만 대문도 따로 없는 그냥 평범한 집이었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에는 아마도 지붕이 초가지붕이었을 걸로 상상이 되지만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보면, 왼쪽 둔덕에 감나무 한 그루가 우물과 논을 바라보며 높이 서 있었고, 집 뒤켵 부분은 바로 대나무숲을 시작으로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담장 오른쪽 부분엔 창고 겸 화장실이 있었다. 아궁이에서 나온 재와 산야초를 쟁여놓은 곳이 바로 화장실이었다. 퇴비제조장이었던 셈이다. 잿가루 위에서 대변을 보고 신문지로 밑을 닦던 장면이 생각난다.
전라도 말로 '정지', 부엌에는 커다란 무쇠솥을 얹은 아궁이가 두 개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소 한 마리, 돼지 몇 마리, 닭 몇 마리 키우는 건 집집마다 기본이었다. 가마솥에서 익은 밥은 무슨 까닭인지 서울에서 먹던 밥보다 더 고슬고슬하고 고소했다. 여름이면 끼니마다 밭에서 키우던 '솔'(부추)을 외삼촌이 조금씩 베어 오셔서 겉절이를 만들어 먹던 생각이 난다. 1970년대 중후반은 냉장유통이란 건 개념조차 없던 시대라, 생선과 고기는 귀했다. 어쩌다 오르는 갈치는 바싹 마르고 싱싱하지 않았다. 늘 백구든 황구든 강아지 한 마리가 대청마루 근처에서 얼씬거렸고, 어느 날 저녁 올라온 고기국을 먹다 이게 무슨 고기냐고 물으니, 아까 대청마루 지키던 그 놈이란 소리 듣고 기겁을 했던 기억도 난다.
고창읍내 방향에서 내려오는 개천은 물이 맑아 물고기도 많았고, 사촌형들을 따라 천렵을 다니기도 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는 사촌 형이 수영을 가르쳐 준다며, 장마 뒤 불어난 개천 안쪽에 너를 던져 넣는 바람에 엄청 무서워하면서 개헤엄쳐 나오던 기억도 난다.
고창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온다. 수십 센티도 쌓이곤 하는데, 6학년 겨울방학 때에는 친구 조민규와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이 내리는 산에 산토끼 잡으러 간다고 올라갔다가 둘이 동태처럼 꽁꽁 얼어서 내려와 어른들 걱정시킨 기억도 난다.
매산 마을에는 길에도 밭에도 논에도 큰 사각형 바위덩어리들이 많이도 있었는데, 동네 분들은 거기에 고추도 말리고 그랬고, 애들은 바위 위에 오르고 뛰어내리며 놀곤 했다. 그 돌들이 지금 고창 고인돌 공원에 있는 고인돌들이다.
그 당시에는 여름밤에 모기향 격으로 '시정'(마을정자)에서 짚불을 태우면서 더위를 식히곤 했는데, 논에 반딧불이들이 날아다니곤 했다. 전기가 안 들어오던 당시에 은은한 조명쇼였다.
내게 '고향'하면 떠오르는 곳은 내가 태어난 신림면의 그 집이 아니라, 방학을 보내던 외갓집이었는데, 고인돌 공원 조성하면서 집들이 다 헐렸다. 공원 조성으로 고향을 잃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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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장희, 한잔의 추억
'한 잔'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지만, 끝없이 마시고 또 마시다 보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는 게 또 술이지요. 모든 게 '적당'해야 탈이 없는 건데, 그렇게 잘 안 되는 게 사람의 삶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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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 뉴기니의 알콜중독이 문제?(2018. 12. 18.)
같은 부서 다른 직원들은 11월에 5층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나만 6층에 남아 있었는데, 어제 사무실을 옮김으로써 나도 동료들과 같은 층에 있게 되었다. 점심도 같이 먹으러 다닐 기회가 많아져 자연히 접촉이 늘어날 걸로 보인다.
어제는 늘 점심을 엮는 역할을 하는 말레시이사 출신Shankar와 일본 출신 Miyuki, 이름상 프랑스계로 보이는 Yvonne, 이렇게 넷이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여전히 나는 주로 듣는 입장이고, 아마도 끝까지 그렇겠지만, 밥 먹고 커피 마시면서 이 사람들 수다가 장난이 아니다. 수다라는 게 다 그렇지만, 어떤 얘기하다가 나온 단어에서 파생되서 전혀 엉뚱한 얘기로 튀기도 하고 그런다.
Yvonne은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이마에 주름살로 봐서는 은퇴가 멀지 않은, 짐작에는 환갑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데, 스물 다섯 먹은 아들이 일자리 때문에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사는데, 얼마 전에 시베리아 지역 출신 여성과 결혼을 했다 한다. 결혼식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어느 날 자기한테 아들이 전화해서, "저 결혼해요!" 그러구 끝이었더나. 그러니까, 시베리아 어디냐 얘기가 오가더니, 며느리 된 여성이 어린 시절에 겨울에 영하 60도, 70도(과장이 심한 듯도 하고) 씩 되어 소련 정부에서 정착지원금을 주어서 사람들이 살도록 하는 그런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남자들이 매일 술만 먹고 여성들을 패기 일쑤인 동네에서 살아봐야 인생 전망 없으니 너는 일찌감치 외지로 나가라고 그 어머니가 딸내미를 해외로 내보냈다나.
알콜중독이 문제라고 얘기가 튀었다. 그러자 Shankar는 알콜중독이 파푸아 뉴기니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얘기를 시작하더니, 파푸아 뉴기니는 남자고 여자고 알콜중독이 많고, 서로 술 먹고 많이 싸운다고 한다. 직장인들이 목요일날 주급을 받는데, 바로 술 먹는 데 다 써서 금요일엔 잔고가 제로라나. 나아가서, 파푸아 뉴기니가 외지인들에게 아주 폭력적인(violent) 사회여서, 그곳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은 전기철조망이 둘러지고 순찰차가 계속 도는 거주지역에 살고, 아침에 경호를 받으면서 일터로 갔다가 해지기 전에 거주지로 돌아온다고 한다. 아무 이유 없이 지나가는 행인을 폭행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다른 사람이 신고 있는 신발이 맘에 든다고 뺏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는 얘기까지 했다.
파푸아 뉴기니에 대해 궁금해져서 위키피다아 검색해 보니, 알콜중독 얘기는 안 나오지만, 일부 도시부를 제외하고는 부족사회로 살고 있고, 소총과 중화기로 무장을 한 상태에서 타부족의 공격이 있는 경우 피의 보복을 하는 생활을 아직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보인다.
세상은 참 넓고,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이 얘기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원시사회처럼 사는 지역도 있다.
오늘 점심엔 어떤 나라 얘기가 나올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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